이 이야기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겹쳐 쌓기'라 할 수 있다.
먼저 표현 면에서 화음을 겹쳐 쌓는 것처럼 이미지를 겹쳐 쌓는다. 한없이 가볍지만 고유한 무게를 지닌 새와 눈. 한 눈씩 각기 다른 세계를 보며 두 세계에 걸친 아버지와 새. 그들은 꽉 쥐면 바스러질 듯이 나약하지만, 결코 작별하지 않는다. 뼈에 구멍이 숭숭 뚫린 채로 조금만 피 흘려도 죽고, 조금만 굶어도 죽어 버리는 새들은 공룡이 멸종한 시절부터 지금까지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왔다.
내용 면에서도 모두의 일인칭이 하나로 겹쳐진다. 하늘에서 지상까지 떨어지며 무수히 결합하는 눈의 결정처럼. 무고한 사람들이 해변으로 끌려 와 총살당한다. 누군가 그 참극을 목도한다. 제삼자였던 목격자는 일차적인 목격을 통해, 이차적으로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목격담을 통해 참극을 내재화한다. 듣는 사람들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일인칭 체험을 한다. 한나무도서관 낭독회 행사에서 이 책의 한 대목을 읽으려고 집에서 연습해 봤다. 아이 안은 엄마들이 줄지어 총 맞아 죽는 것을 본 다른 엄마가, 절멸한 가족의 유일한 생존자가 되어 찾아온 인선 아버지에게 목격담을 들려주는 대목이다.
"그 사름이 입을 떼신디, 그날 모래밭에서 아이들을 봤느냐곡.
그 말을 막 들어신디 명치 이신 데 이디, 오목가심 이디, 무쇠 다리미가 올라앉은 것추룩 숨이 막혀서. 내가 죄지은 것도 어신디 무사 눈이 흐리곡 침이 말라신디 모르주. 몰른다곡 내보내야 하는 것을 알멍도 이상하게 대답을 하고 싶었져. 꼭 내가 그 사름을 기다렸던 것추룩. 누게가 이걸 물어봐주기만 기다리멍 십오 년을 살았던 것추룩. 그래 사실대로 대답을 했져. 아이들이 이서나긴 했다곡.
심장이 벌어질 것추룩 뛰멍 말이 더듬더듬 나와신디, 정작 그 사름은 도근하게 한참 가만히 있당 또 물어봐서. 혹시 갓난아기 울음소리도 들었느냐곡. 처음 보는 사름인디, 우리 서방이 알민 큰일이 날 건디, 내가 넋이 나간 것추룩 또 대답을 해서. 울음소리는 못 들었지마는 애기를 안고 서 이신 여자들을 봤다곡.
그 사름이 꼼짝 안 허곡 앉아만 이시난, 이제는 더 물을 말이 어신가보다 생각해서. 경 헌디 그 사름이 다시 묻는 말이, 바당갓에 떠밀려온 아기가 있었느냐곡. 그날 아니라 담날이라도, 담달에라도. 내가 더 고라줄 힘이 없었져…… 무사 십멫 년이나 지낭 나헌티 와그네 이러는곡 묻고 싶어나신디 그 말은 입에서 안 떨어졌주. 아무도 안 떠내려왔다곡 겨우 가만가만 고라줌신디, 그 사름 샤쓰가 목깃부터 등짝까지 몬딱 땀에 젖은 게 그제사 눈에 들어오는 거라."
절반쯤 읽다가 이건 안 되겠다고 포기했다. 입에 붙지 않아 설겅설겅 겉도는 제주 사투리를 읽으면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던 탓이다. 당사자, 목격자, 작가, 독자 등 각자의 일인칭이 융합해 이야기라는 결정이 만들어진다. 먼지와 재가 눈의 핵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상처와 고통 없이는 결정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강의 작품과 살아남은 자들의 연대는 눈꽃처럼 아름답다. 하지만 그 과정은 처절하다. 우리가 그 사태를 개인화하기 위해서는 피를 흘리고 고통을 느껴야 한다. 잘린 손가락의 신경이 살아나도록 3분에 한 번씩 바늘에 찔려야 하는 인선과 마찬가지로. 책을 읽을 때마다 몸이 아팠다. 읽는 사람이 명치 위에 돌덩이가 올라간 듯이 답답하고 밥도 먹히지 않는 글을 쓰기 위해서 쓰는 사람은 얼마나 아팠을까. 심지어 나만 아파서 되는 일도 아니다. 인선이 엄마를 견딜 수 없어 가출한 것처럼 경하 주변의 사람들도 떠나갔다. 일인칭의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서, 그 아래 짓눌린 채로는 도저히 사는 것처럼 살 수 없어서.
그래도 그 수밖에는 없다. 그들의 비인간화에 맞서 연대하는 수단은 인간화뿐이다. 무감한 숫자를 하나하나의 인간으로 되돌려야 한다. 저마다의 삶과 가족이 있었던 한 명, 한 명씩 삼만 명. 오장육부가 오그라지도록 무서운 사랑을 받았던 사람들 삼만 명이 죽거나 사라졌다. 일부터 시작해 삼만까지, 한 명당 3초씩만 할애해도 희생자들의 이름을 전부 부르는 데 9만 초, 25시간이 걸린다. 밤을 새워 하루를 꼬박 불러도 부족하다. 그 사이사이에 애끓는 통곡과 속으로만 삼켜야 했던 피눈물까지 더하면 대체 얼마나 더 시간이 필요할까. 남은 이들의 평생. 그다음 세대의 평생. 이 나라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고 그 이름들을 불러야 할 것이다.
그 아픔을 내 속에 옮겨 심어 내 아픔이 되어야만 비로소 행동할 수 있다. 제주 4.3 평화재단을 찾아가 진상조사보고서를 읽고, 살아남은 사람들과 잊지 않은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유족들이 장학금을 받고, 인공관절 수술비를 지원받는다는 소식에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제주도민 삼십만을 싸그리 죽여도 좋다고 했던 자들은 과연 단 한 명의 뼈아픈 상실이라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었을까.
죽은 사람을 위해 울지만 결국은 산 사람이 딱하다. 그들은 혹은 우리는, 인간에 대해 완전히 절망한 채로도 살아가야 한다. 불덩이를 가슴에 묻고,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등에 올리고. 내가 그 갱도에 묻혔다면 마지막으로 빌었을 소원. 이제 와서 기적적으로 구출되기보다는 지상의 내 사람들이 나를 지우고 잘 살아 주기를 바랐을 것 같다. 굳이 죽은 사람까지 매달지 않아도 산 사람의 처지가 이미 차고 넘치게 어려울 테니.
내가 왜, 우리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이유는 없다. 설령 알아도 없다. 냉전 시대의 비극, 약소국의 설움, 혹은 이념 충돌로 인한 동족상잔. 어떤 분석을 들이대건 그건 이유가 될 수 없으니까. 다만 지독한 부조리 속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서 다음 문장을 부표처럼 잡고 버틸 뿐이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 제주 4.3 평화재단 https://jeju43peace.or.kr/